[기고] 8·15광복은 절로 오지 않았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해방된 지 79년째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되찾은 민족적 기념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끈질기게 버티던 일본은 드디어 이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8월15일은 대한민국 광복의 날이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악랄한 민족 말살 통치 방식을 택했다.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 등을 강조하며 황국 신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신사 참배와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전국에 조선인 애국반을 만들어 생활 전반을 통제하였는데 학교에서는 한글과 한국어 교육이 중단되고 한국의 역사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라며 강압적으로 창씨개명을 요구했다. 급기야 수많은 청년들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끌려갔다. 또 전쟁 시설물 건설과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더욱 천인공노할 일은 젊은 여성들을 남양군도 등의 일본군 성노예로 끌고가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우리의 8·15 광복은 절로 오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 결과다. 8·15 광복은 비록 우리의 힘만으로 얻은 결과는 아니지만 한국은 일제의 강압과 약탈, 멸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자유 해방, 바로 빛을 다시 찾은 광복이었다. 농민들은 징용과 공출에서 해방되었고, 노동자는 강제 노동에서 풀려났으며, 학생들은 한국의 혼을 말살하려던 황국신민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징병과 징용, 위안부로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이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의 역사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아직도 A급 전범들인 도조 히데끼와 야마모토 이소로꾸 같은 인물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조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권력을 장악한 전시 대본영의 수상이었다. 그는 육군대장의 계급장을 단 장군으로 죽어서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칠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됐고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한 해군대장아먀모토 이소로꾸는 진주만 공격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부친이 56세에 얻은 아들이라고 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한 그는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미국통이었던 그는 미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명령에 따라 진주만 공격에 나섰고 이로 인해 일약 전쟁 영웅이 됐다. 그는 이후에도 일본 해군 최고 사령관으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을 지휘했다. 그도 패전 후 체포됐다면 사형선고를 면할 수 없었겠지만 종전 전 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는 전쟁이 치열했던 1943년 4월 18일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공군 폭격기로 이동했다. 그런데 미군이 이 정보를 입수했고 출동한 미군 전투기들이 부건빌 섬 상공에서 야마모도가 탑승한 비행기를 격추했다. 이 작전의 성공은 일제의 패전을 예고한 사건이다. 8·15 광복이 일본 패전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체적 요인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역사 학계의 시각이다. 아무튼 8월15일은 민족의 기쁨으로 자유 세계와 함께 한 연합군의 전승일, 최대의 경축일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광복 대한민국 광복 일제 강점기 자유 해방